지난글들

공중전화(2001.4.11)

samworld 2015. 11. 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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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11.

 

 

 

선배들과 오랜만에 술 한 잔 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전철역에서 자취방으로 가는 길엔 공중전화 박스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곳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가슴속을 털어내고 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신나게 얘기하는 남자는 아마 여자친구와 통화하는 것이겠죠. 재잘재잘 수다떠는 여학생은 무엇이 그리도 좋을까요. 우울한 얼굴로 심각한 저 아저씨는 또 무슨 아픔을 토해내고 있을까요? 그런 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찬 공중전화 박스입니다.


오늘도 공중전화 박스를 지나쳐 갔습니다. 그 중 동전 전화기가 한 대 보이더군요. 수화기가 전화기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100원을 가지고 통화하다 50원이 남은 모양입니다. 반환안되는 돈이니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쓰라고 위로 올려져있는 수화기에서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느낍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예전에 택시운전을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시작해서 대학교 1학년 때까지 하셨으니 오래되셨죠. 개인택시는 일정연한 이상을 채워야 면허가 나오는데 중학교 때 개인택시까지 받으셨으니 꽤나 오랜 시간을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보내신 겁니다. 회사택시를 모실 때는 하루에 2교대로 오전반/오후반을 번갈아가며 하셨고, 개인택시를 하실 때는 자유롭게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곤 하셨답니다.


지금이야 너도 나도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만 아버지가 택시운전을 하실 때만 해도 그런게 전혀 없었습니다.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한게 고등학교 무렵이니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면 연락할 방법이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잘 갔다오시려니 하고 있을뿐이죠. 그렇다고 아버지가 집에 전화를 하시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어머니는 직장에, 저는 학교에 있어 집에는 아무도 없을테니 전화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아버지가 전화를 안하시는건 전화비가 아까워서일겁니다. 아버지가 허튼 돈 쓰시는 걸 안 좋아하시거든요. 요즘에야 어머니께서 나이들수록 옷을 갖춰입어야 하시며 이것저것 사드려서 괜찮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입으시는 양복은 십년이 지났는지, 이십년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답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아무리 낡고 오래된 것도 별로 신경 안쓰시는 성미시랍니다.


그런 아버지가 가끔, 아주 가끔 집에 전화를 거실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걸려온 아버지 전화에 화들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하면 언제나 대답은 같습니다. 택시 몰고 길을 가다 공중전화박스에 돈이 남아 수화기가 올려있는 걸 봐서 전화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통화는 금방 끝나고 맙니다. 대개 한 통화 할 정도의 돈밖에 안 들어있으니까요. 뭐 특별한 일이 있어서 전화한 것도 아니니 길어질 일도 없지만요.


공중전화에 남은 돈을 보며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냥 그대로 두고 자취방으로 향했습니다. 다들 핸드폰 들고다니는 요즘에는 50원 남은 공중전화가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그 50원으로 누군가는 기쁘게 통화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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