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친구
#1
나이가 들수록 드는 생각이 있다.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낼 친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날 술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꺼내들어도, 마땅히 불러낼 사람이 없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도 그런 얘기를 했다. 점점 술 한 잔 할 사람이 줄어든다고. 학생 때는 술마실 사람 많다. 수업 듣다가 놀다가 한 잔 하러 가자고 푹 쑤시면 대뜸 따라나온다.
그것은 생활에 바쁘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직장을 다니고, 어떤 친구는 결혼을 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몇년간은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느라 정신이 없게 마련이다. 결혼도 마찬가지. 초반에는 거기에만 집중을 해야 한다. 직장 동료와 술마시는 것은 조직력의 확보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활성 등을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친구와 만나는 것은 여유에 속한다. 혹은 체력과도 연관이 있다. 이제 나이가 드니 술마시는 것도 예전같지 않고, 숙취도 잘 풀리지 않는다. 이 둘은 결합해보면 안 그래도 생활에 치여사는데 술까지 마시면 다음날 영향을 주게 되니, 술자리를 자제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술은 직장사람들과 마시는 것으로도 충분히 많으니 더더욱 몸을 사리게 된다.
모순적인 것은 그렇게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술자리를 피하고 몸을 사릴수록 술친구가 더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마음을 100% 터놓고 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할수록 외로움은 커져가고 그럴 때 마음편히 술 한 잔 할 사람을 찾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피했는데 불러낼 사람이 남아있을까. 문득 느낀 고독에 수첩을 찾아보지만 한동안 연락안했던 사람에게 전화하자니 난감하고, 술마시자고 부를 때는 튕기다가 자기가 마시고 싶다고 전화하자니 난처하다.
그렇게 우리는 술친구를 잃어간다.
#2
마음편히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는 언뜻 생각하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긴장 속에서 살아가다 잠시 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는 소중하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보면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하는 전투에서 병사는 피폐해진다. 방금까지 낄낄대던 동료가 포탄에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단 몇 시간만이라도 후방에 가서 따뜻한 음식도 좀 먹고 쉬다 보면 괜찮아진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잠시의 여유가 구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마음편한 술친구를 찾는 것은 어렵고, 나이가 들수록 그러하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허나 여유는 소중한 것. 이 모순적인 상황에 대응하여 나는 몇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
내가 그런 술친구를 찾게 될 때를 대비해서 나 혼자 노는 방법, 나 혼자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찾고 익히고 있다. 나라고 해서 외로움이 없고, 술생각날 때가 없을까. 그럴 때 연락할 사람이 있지만, 언제든 거절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 혼자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거절당했다고 서운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잘 노는 타입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혼자서 놀 것은 정말 많다. 다만 혼자서 술 마시는 일만은 피하고 있는데, 그건 외로움을 느끼는 감각을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외로움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둘.
일종의 대안적 술친구가 되려고 한다.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 달려나가는 친구는 기본이고, 현실적으로 술마시가 어려운 사람이 여유를 찾고 싶어할 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결혼한 여자친구(내 친구들 중 다수가 몇 년 내로 그렇게 될 것 같은데)의 경우 남편 아닌 남자친구와 술 마시는 거 쉽지 않다. 남편까지 나와 친한 경우라면 또 몰라도. 그러나 점심 한 끼, 차 한 잔 정도는 가능하다. 직장 다니는 친구도 술자리는 부담스러워할 수 있지만 밥이나 차는 부담이 덜하다. 술을 안 마시고도 술 마신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술 한 잔은 알콜 섭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유가 목적이다. 그렇다면 꼭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형태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면 된다. 그것이 내가 목표하는 바다. 다만 술이 가져다주는 긴장완화 효과가 다른 수단에 비해 탁월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엠티 가서 술을 퍼마시는 것은 그럼으로써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속깊은 대화를 유도해 친목을 다지자는 의미이다. 변질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술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술은 자연스럽게 긴장을 이완시켜 가벼운 대화, 깊은 대화 모두를 가능케 한다. 다른 수단은 이같은 효과를 내기 힘들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술마시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편안한 사람, 어떤 얘기를 꺼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식되고 있으므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도 그러한가. 대개의 사람은 술을 마셔야 속얘기를 꺼낼 수 있다. 특히 가벼운 여유가 아니라 진지한 고민상담이 있는 경우 대낮에는 분위기도 안 살고 쉽지 않다.
요즘 술자리에서 일부러 짖궃은 질문, 난처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낸다. 술이 적당히 올랐다고 생각되면 대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건 무례로 보일 수도 있고, 쟤 왜 저래, 저런 것만 좋아해 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안다. 알면서도 그러는 것은 이후에 술 안 마시고도 깊은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바탕을 지금 마련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한계 안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 한계를 깨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지금 그 한계를 깨고, 가능한 영역을 넓히려 하는 것이다. 그래야 대낮에도 술마신 것과 비슷하게 속깊은 얘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다.
물론 더욱 더 편안한 사람, 몇 개월 연락안하다가도 생각나서 전화했을 때 어제 본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기본이다. 언젠가 말했지만 내 홈피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셋.
나도 삶에 바빠지면 낼 수 있는 시간과 마음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입시에 붙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입시의 경우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기 때문이다. 사시로 빠지면 여유찾기 힘들다.
어쨌든 한정된 시간과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다. 질이 떨어진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 할만한 소중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시간과 마음을 주려 한다. 사람의 중요성을 깨달을수록, 인생의 소중함을 알게 될수록 나와 심정적으로 연결된 베스트 급의 사람에게 더욱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에게 최고의 대우를, 그게 요즘 내 모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