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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관계는 없다(2002.10.5)

samworld 2015. 11. 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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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5



#1

이번에 아버지가 입원하셨을 때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가면서 20만원을 뽑아서 갔다. 처음에는 상태가 별로 심하다고 생각안했지만 사람일은 어찌될 수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일단 통장에 있는 돈을 다 빼가지고 갔다. 그 돈으로 각종 검사와 응급실 비용, 그 외의 잡비 등을 다 계산했다. 퇴원하면서 병원비는 부모님이 냈지만 그 전까지 모든 비용은 내가 댔다.

어머니는 그 돈 나중에 아버지한테 달라 그러라고 하셨다. 난 됐다고 했다. 그건 내가 쓸 돈이라고 했다.


#2

난 부모님께 말하곤 한다. 나 유산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다 쓰시고 돌아가시라고. 우리 집 가난한거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유산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된다. 그래도 나는 나 혼자 받는거라 제법 쏠쏠하다. 외아들인 건 이럴 때 좋다. 결혼할 때는 별로 안 좋을 것 같지만.

부모님도 말씀하신다. 나중에 늙어서 내 신세 안 지고 살겠다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식들도 월급 받아서 사는 형편에 부모 돈 대주면서 살면 살기 힘들다. 자식한테 부모 생활을 책임지라는 것은 부담이다."

그러면 난 화답한다. 가진 재산 두 분 사시는데 다 쓰시라고. 그거 가지면 화려하게는 못살아도 두 분 사시는데 큰 지장은 없을 돈이다. 물려줄 생각만 안한다면 어느 부모나 자기들 노후는 걱정안해도 된다. 집이라도 한 칸 남겨주려니, 결혼할 때 한 몫 챙겨주려니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거다. 또 말한다. 쓰시다 남는 거 있음 어디 기부라도 하시라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 있음 도와줘도 된다고.

이 얘기를 들은 이모는 아주 놀라워한다. 세상에 이런 부모-자식이 어딨냐고 하면서. 어딨긴..여기 있지.



#3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대충 이렇다. 상당히 독립적이다. 나도 부모님도 서로에게 특별히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콩가루 집안이라거나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다. 서로에게 잘한다. 그러나 독립적이다. 각자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한다. 그리고 난 이게 좋고 편하다.

난 나중에 결혼할 때 부모님이 돈 한 푼 안 주셔도 별 상관없다. 내 부인은 싫어할 수도 있겠지. 싫어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황당해할 수는 있겠다. 어쨌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당장 용돈과 학비를 안 주셔도 괜찮다. 부모님이 지금 나에게 학비를 대주고 생활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부모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셔서이다. 내가 공부에 소질이 있으니 그걸 뒷받침해주시고 싶은거다. 아마 내가 공부에 소질이 없었다면 일찌감치 전문기술을 닦게 하셨을거다. 그리고 나보고 돈 벌어서 살라 그러셨겠지. 그게 아니고, 이 쪽에 장래성이 있어보이니까 밀어주시는거다. 어디까지나 두 분이 하시고 싶으셔서 그런거지, 부모니까 당연히 그러는게 아니다.

요약하면 이렇다. 부모님이 내 뒤를 봐주시는 건 그렇게 하고 싶으셔서, 그게 좋아서 그러는거다. 나도 상당히 이기적이라 주시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안 준다고 뭐라 그러지도 않는다. 주면 받되 안 주면 그만인거다.



#4

부모니까 당연히 학비와 용돈을 줘야하고, 부모니까 당연히 결혼할 때 결혼자금을 대줘야하고, 부모니까 당연히 유산을 남겨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자식이니까 당연히 부모 말을 들어야하고, 자식이니까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자식이니까 당연히 나중에 부모를 모셔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당연시한다. 글세..그게 왜 당연하지?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런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과연 당연한걸까? 사람의 도리라 그렇다고? 그러니까 그게 왜 사람의 도리인건데?

너무 과격하게 나가는 것 같다. 조금 순화해서 말해보자.

주위에서 그런 모습을 가끔 본다. 부모는 나중에 자식에게 부양받을 생각을 한다. 내가 이만큼 널 키워줬으니 이제 네가 날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업을 고르거나 학과를 선택할 때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강요한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거야 라는 말로 포장해가면서. 어디 누구네 자식은 부모에게 뭘 해줬다더라, 한 달에 얼마를 준다더라 하면서 자식에게 압박을 가한다. 경제적인 문제를 벗어나서는 또 이런 모습이 있다. 부모가 자식의 일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해버린다. 자식이 제 뜻을 펴려 하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로 꺽어버린다. 부모라는 명목으로 자식을 제 마음대로 키우려 한다.

반대로 자식도 그리 잘하는 것은 없다. 나도 그렇지만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당연히 여긴다. 부모가 조금만 못해주면 '다른 집 부모는 다 해주는데 우리 부모는 왜 그러냐'고 투덜거린다. 부모는 원래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 잘 먹으라고 생선을 구으면 항상 꼬리만 먹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나중에 자식이 커서 '우리 부모님은 꼬리만 좋아하셔'라며 생선 꼬리만 실컷 갖다줬다지. 자식은 그렇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알지 못하고 당연시한다.


#5

세상에 당연한 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에게 이렇게 해야한다는 법도 없고, 자식은 당연히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도 없다. 각자가 하고 싶으면 하는거다. 주면 받되, 안 준다고 따지거나 화내는 것은 옳지 않다. 부모도, 자식도 봉이 아니다. 각각의 독립된 사람이고, 인격체다.

부모-자식 관계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관계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광장에는 별로 안 그런 것 같지만) 선배를 무슨 봉으로 아는 후배들이 있다. 선배니까 당연히 밥을 사줘야하고, 돈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후배가 있다. 선배가 무슨 조폐공사냐? 선배나 후배나 돈 없기는 마찬가지다. 반대로 선배 중에는 후배를 자기 밥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할 일을 후배에게 다 떠맡기고, 일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선배는 당연히 후배를 위해 돈을 써야하고, 후배는 당연히 선배의 심부름을 해야하는 법은 없다. 그런 말로 선배를, 후배를 옭아매지 마라.

이건 연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니까 당연히 돈을 써야한다, 여자는 당연히 애교부려야 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할 능력이 있음 하는거다. 무슨 날이니까 당연히 선물해야 하고, 항상 만나야하고, 그것도 커플별로 다 다른거다. '커플특별법'같은게 있어서 다 똑같이 해야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 애인은 어떤데 너는 왜 이것밖에 안되냐고 따질 수는 없는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비교는 의미없다. 그럴거면 그 잘난 남의 애인이랑 사귀지.

형제 관계도, 친구 관계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6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자기가 한 만큼 받는거다. 한 만큼 못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열받아할 필요없다.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지, 등가가 아니니까.

간단하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누구가 자기에게 뭘 해줬을 때 받고 싶으면 받는거다. '무슨 무슨 관계는 당연히 이래야 해'라며 자기가 받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는거다. 어떤 관계든 강요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된다. 세상에 당연한 관계란 없다. 자기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면서 상대가 뭘 해주기만 바라는 것, 그게 인간의 도리라며 압력을 가하는 것, 받은 것을 당연히 여기며 고마워하지 않는 것.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탁은 다르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있고, 부탁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탁한 뒤에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 각자의 사정이 있는거니까. 아님 내가 그만큼 주지 못한거니까. 상대를 탓할 필요없다. 부탁받았으면 마음내키면 가능한 도와주면 된다.



#7

난 나중에 부모님을 모실 생각이다. (점점 더 결혼하기 힘들 생각만 골라하는군) 부모님이 하시고 싶은 것들도 들어드리고 싶고. 생활비와 용돈도 드릴거다. 이건 내가 외아들이고 장남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끝까지 밀어줄 생각이신걸로 안다. 나와 부모님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라 이런 얘기도 가끔 한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조부모께 받지 못한 것, 그래서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힘들었던 것을 내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걸로 알고 있다. 밀어주고 안 밀어주고를 떠나서 유산도 남겨주실거다. 내가 보기엔 남겨준다기보다 워낙에 검소하신 분들이라 다 못 쓰시는 것일 것 같지만 말이다. 대화해보면 부모님도 의무감에 그러시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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