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연구

결혼마음

samworld 2015. 11. 1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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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생(生)하고 유(流)하고 멸(滅)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막을 수 없다. 마음은 저절로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이 생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생하지 말라는 마음이 생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마음이 멸하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멸하라는 마음은 멸하지 않는다. 마음은 그런 것이다. 마음이 생하고 유하고 멸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번뇌가 사라질 터인데 그게 쉽게 되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생하고 유하고 멸하는 것을 바라볼 수는 있다. 이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떤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는가.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관이다. 관은 생하고 유하고 멸하는 마음을 잡기 위한, 그 마음을 끊기 위한 첫 걸음이다.

 

 "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

 

 "이 마음이 구체적으로 커져가네"

 

 "어느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네"

 

 마음을 관한 뒤에는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된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를 또한 관해야 한다.

 

 결혼에 대한 내 마음과 그 마음의 뿌리를 관한 결과는 이렇다.

 

 작년 들어 갑자기 결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관계의 불확실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내 인간관계는 확장 일로에 있었다. 수시연락체계가 가동중인 사람만 수십명. 매 저녁과 매 주말을 약속으로만 꽉꽉 채운 나날이었다. 만날 사람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최근 2년 정도 사이에 인맥의 규모가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반쯤은 베스트 위주의 인맥관리를 하겠다는 내 결단 때문이고 반쯤은 공부한답시고 외부 활동을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약한 끈부터 끊어지게 된 때문이다.

 

 이렇게 줄어들어가는 인간관계를 바라보면서 그저 아는 사이, 가끔 보는 사이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이는 'best'에 대한 강한 충성도로 이어졌다. 이 생각은 효과를 보여 작지만 탄탄한 인간관계가 구축되었고 나는 이 관계에 꽤 만족을 하였다.

 

 그러나 'best'들로만 짜여 있다는 인간관계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best도 멀어질 수 있고, best가 best였던 사이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년 전의 베스트와 지금의 베스트는 다르고, 지금의 베스트와 5년 뒤의 베스트가 또한 다를 것이다.

 

 이것은 특정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의 문제이다. 관계란 서로 다른 둘 혹은 그 이상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과 일이 만나 2를 만드는 것이 관계가 아니라 일과 일 사이에 존재하는 연산자가 관계이다. 관계란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연결이기 때문에 양 대칭에 있는 존재가 변하면 관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덧셈 기호나 뺄셈 기호는 그대로이나 대칭된 숫자가 변하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변한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한다. 결국 우리의 관계도 변한다. 관계란 본래 그런 것이다.

 

 나는 최근에 부모님과 나의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에서 이 점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님은 각자 직장을 다니셨고, 서로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 혹은 나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자취를 나오고 두 분이 한 곳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벌써 6년째다. 요즘 집에 가면 부모님 두 분의 생각이 참 닮았다는 것을 느끼고, 나와 부모님의 생각이 또한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러한데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들끼리의 관계는 오죽하겠는가. 영원한 관계는 없다.

 

 영원한 관계는 없다는 깨달음은 고시 공부의 스트레스와 더불어 나로 하여금 고립무원을 느끼게 했다. 결국 인간은 혼자라는 외로움. 지금의 관계도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절박함. 그에 대한 반발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고, 그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변하는 것이 본질일 때 관계를 유지하려면 같이 변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고, 피드백하고, 그런 과정을 같이 겪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달라진 모습에 어색해 하지만 매일 보는 친구는 변화를 못 느끼는 것처럼 관계를 유지하려면 같이 변해야 한다.

 

 문제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사회생활하다보면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것. 부모 자식간에도 1년에 한 두 번 볼까 말까한 생활이 계속되다보면 관계의 유지를 위한 피드백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했다. 물론 결혼의 현실태가 어떠한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끊임없는 피드백의 가능성이다. 결혼은 같이 있는 것을 본령으로 하고, 끊임없는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이 이상과 달리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친우, 애인 관계에서 담보할 수 없는 끊임없는 피드백이 가능하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영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보였다.

 

 그것이 내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이다. 이런 전제에서 결혼만을 위한 결혼, 나이가 차 해야만 하는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귀는 게 목적인 연애, 혼인신고가 목적인 결혼은 할 수 있어도 안한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개팅이나 선을 볼 수는 있지만 연애나 결혼을 하기 위해 소개팅이나 선을 볼 수는 없다.

 

 내게 있어 결혼이란 관계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의 실현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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