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번 (2009.6.1)
#1
처음은 '녹차 식빵'이었다. 결혼 선물로 컨백션 오븐을 받고 녹차 식빵에 도전했다. 식빵이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하는 것은 재앙에 가깝다. 처음 치는 사람이 돈 딴다는 고스톱판의 법칙은 예외일 뿐이다. 대부분 덤벙거리다 실패로 끝난다.
내가 그랬다.
녹색이긴 한데 잘 부풀지 않은 '녹차식빵'은 '변신하다 실패한 헐크' 같았다. 헐크를 보고 멋지다고 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변신하다 실패한 헐크'를 보고 멋지다고 할 사람은 없다. 식감은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으나, 아무리 뚝배기보다 장맛이래도 모양은 중요한거다. 봉긋 솟아오른 식빵의 본령을 따르지 못한 식빵은 그저 조금 부풀어오른 빵일 뿐이다.
이후 식빵은 한 번 더 실패함으로써 '발효 과학'의 어려움을 깨닫게 해 주었다. 발효는 과학이고 어렵다.
#2
다음은 '생강 쿠키'였다. 제빵 중에서 식빵이 제일 어렵다는 경험자의 조언을 받고 식빵을 포기한 후,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투자 없이 얻으려는 것은 당연한 인간심리지만, 필요한 투자를 외면한 채 있는 것만으로 뽕을 뽑으려는 것은 어리석다. 필요한 투자는 해야 하고, 투자를 함으로써 일이 더 쉬워진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쿠키가 그랬다. 재료를 더 샀어야 한다. 재료를 더 사서 보다 쉬운,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다는 머핀으로 넘어갔어야 한다. 그러나 집에 생강 가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머핀틀과 머핀용 일회용 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다 본질적으로는 베이킹 파우다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강쿠키에 도전했다.
그랬다. 꿀도 있고, 생강 가루도 있고, 밀가루도 있고, 오븐도 있는데 못 만들 이유가 뭐냐고 생각했다. 재료가 다 갖춰진 것은 식빵도 그랬다. 재료가 없어서 실패한 게 아님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다.
생강 쿠키는 너무 타거나, 너무 덜 익거나 해서, 바삭하면서도 촉촉하지 않고, 바삭하거나 촉촉하기만 했다. 촉촉... 그건 꿀의 힘이었고, 바삭... 그것은 고온의 힘이었다.
어느 쪽이든 극단에 치달은 것은 먹기 힘들었다.
#3
그리고 '오렌지 머핀'을 만들었다.
필요한 투자(머핀틀과 머핀컵, 베이킹 파우다)를 하고, 시키는 대로 체치고, 조물거리고, 비비고, 섞고, 반죽을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었다. 필요한 것은 다 있었고, 하라는 것은 다 했었다.
결과는 달랐다. 오렌지 머핀은 성공했고, 아내는 머핀 5개를 싸들고 회사에 갔다.
달라진 것은 더 쉬운 목표를 선택했다는 것 뿐인데, 결과가 크게 달라졌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를 수 있는 실력을 키운 뒤에 올라가야 한다. 그 전까지는 쳐다만 보면서 실력을 키우는거다.
이제 나는 가장 낮은 나무를 올랐다. 다음 나무를 언제 오를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 낮은 나무를 맘껏 즐길 생각이다.
언젠가 내가 슬그머니 당신에게 머핀을 내민다면, 이미 검증된 머핀이니 당신도 나와 같이 즐겨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