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문화2015. 11. 1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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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연극을 보신 적이 없다. 설 연휴에 부모님과 함께 무엇을 고민하다가 영화와 연극을 제시했을 때 어머니께서 연극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왕이면 사람이 하는 게 낫지요? 라고 아버지께 동의를 구하시던 어머니는 처음 보는 연극에 대한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처음 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야 첫 만남의 어색함이 사라진다.

 

'장석조네 사람들'을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70년대 서울 달동네를 배경으로 장석조씨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시절 서울에 올라와 단칸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두 분께 맞춤이었다.

 

 연극은 세들어 사는 사람들 간의 투닥거리는 다툼으로 시작한다. 아침부터, 별 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 두 여자. 그들은 다닥다닥 붙어살기에 사소한 것으로도 싸울 수밖에 없다. 이어서 젊은 마누라가 도망가버려 시름에 잠긴 늙은 남편과 이를 보다못해 자기가 직접 찾아오겠다고 나서는 옆방 남자가 등장한다. 다닥다닥 붙어있기에 옆 집도 아닌 옆방에 사는 사이로서 간섭할 수밖에 없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살내음을 맡을 수밖에 없는, 원하지 않아도 밥숟가락 갯수까지 헤아려지는 70년대 달동네에서는 이렇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쓰여진다. 원작자 김소진은 자전적 경험에 기초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로 밀려와 장석조씨네에 모여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 시선에는 어떤 가치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늙은 남편이 싫어서 도망갔다가 붙잡혀 들어온 젊은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정 다녀온 척할 때 옆방 사람들은 모르는 척 받아들이고, 힘은 세서 그걸로 먹고 살려다보니 백골단이 되어 버린 육손이 형도 그 때는 그렇게라도 목숨을 이어가야했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이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시대를 추억하되 거기서 머무를 뿐인 시각은 시절에 대한 회고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땐 그랬지 하는 끄덕거림은 그 시기를 보내고 지금은 그렇게 살지 않는 중장년 관객에게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힘든 시기를 거쳐 자리잡은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할 뿐이다.

 

 70년대 달동네 추억을 지금 이 순간 현실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극은 아무런 위로도, 감흥도 주지 못한다. 시절에 대한 세세한 복원과 정확한 묘사는 잘 그린 정물화로서 흥할 뿐이다.

 

양공주의 아들, 혼혈로 태어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차돌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먹고 살려고 차돌이 엄마는 양공주가 되었고,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차돌이를 낳았다. 차돌이 외삼촌은 누나가 받아오는 미제 물건으로 먹고, 입으면서도 차돌이를 구박한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차돌이 외할머니, 함경도 아즈망만이 차돌이가 인간 구실 하고 살려면 아메리카로 가야 한다며 보낼 생각이다.

 

 차돌이 엄마는 흑인 마이클을 집으로 데려오고, 함경도 아즈망은 이젠 외국인인 것도 모자라 깜둥이를 데려오냐며 성질을 부린다. 잘난 체하지 않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마이클에게 함경도 아즈망이 마음을 열면서 갈등이 해결되고 막걸리 잔치로 연극은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막걸리를 다 마시고 난 뒤, 잔치가 끝나고 나면 현실은 다시 현실일 뿐이다. 흑인 마이클은 받아들여졌지만, 혼혈 차돌이가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여전히 차돌이는 섞였다고 구박받을거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각각 흠이 있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흠을 들추며 낄낄거리다가 자신의 들쳐진 흠 때문에 상처받을 것이다.

 

추억이 아름다울수록 현실은 그만큼 쓰라리다. 흥겨운 막걸리판에 취한 뒤가 더 두려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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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