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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홍차왕자 - 불확실한 영원이냐 확실하지만 제한된 인연이냐
각종문화2009. 1. 2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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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왕자. 12(애장판)
카테고리 만화
지은이 NANPEI YAMADA (학산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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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차왕자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만화다. 보름달이 비치는 밤에 홍차를 마시며 주문을 외우면 '홍차왕자'가 나타난다. (홍차공주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3가지 소원을 들어준다. 이런 기본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만화가 진행된다.

 이 홍차왕자는 굉장히 유용하다. 평소에는 조그맣게 있다가 필요할 때면 펑하고 커진다. 조그마할 때는 귀여운 인형이고, 커지면 멋진 꽃미남이다. 소원은 3가지밖에 말할 수 없고, 세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면 떠나버리지만 그 동안에 이런저런 일을 많이 도와준다. 홍차왕자 중 '아삼'은 투덜거리면서도 집안일을 다 맡아하고, '얼 그레이'는 항상 따뜻하게 옆에서 자신을 부른 주인을 돌봐준다. 심심할 때는 인형처럼 귀여운 재롱을 볼 수 있고, 힘들 때는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짐이 많을 때는 짐꾼으로 쓸 수도 있다. 꽃미남이기 때문에 미남계를 쓸 수도 있고, 호객꾼으로 쓰기에도 좋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소원을 말할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유용한가.

 그렇지만 언젠가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은 홍차왕자와 주인 모두를 힘들게 한다. 그래서 소원을 가능한 말하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소원을 말하면 남은 소원이 몇 개 없음에 괴로워한다.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관계, 주종관계가 아니다. 가장 좋은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 사이일 수도 있다. 레이디와 나이트일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이기에 고민은 커져만가고, 행복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친구 사이라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언젠가는 갈라질 수 있다. 평생을 함께 하는 우정, 영원한 사랑은 현실 세계에서 쉽지 않다. 오히려 어느 순간인가 깨어지거나,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는 일이 더 많다. 현실은 그러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가지 소원을 말할 때까지는 항상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더 나은게 아닐까? 홍차왕자는 제한된 시간이나마 확실히 곁에 있어준다. 게다가 소원만 말하지 않는다면 홍차왕자는 죽을 때까지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은, 우정은 영원할 수 있는 반면에 불확실하다.

 그렇게 보면 홍차왕자와 주인을 묶고 있는 '세가지 소원'은 둘 사이의 품질보증서라 할 수 있다. 그 기간만큼은 확실하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기간이 지나면 그럴 수 없는 품질보증서. 사랑도, 우정도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은 사랑의 영원함을 믿어도 아무도 그것을 보장해줄 수 없는 현실에서, 확실한 품질보증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든든한 일인가.

 불확정성을 제거하는 대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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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