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2018. 7. 1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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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공부를 한참 하던 때에는 펜에 민감했다. 줄을 치거나 글을 쓸 때 펜을 쓸 일이 많아서였다. 자기 손에 맞는 필기구가 있어야 공부가 잘된다는 마음으로(공부를 하기 싫다는 실질적인 이유를 숨긴 채) 문구점에서 이 펜 저 펜 써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할 때는 펜이 더욱 중요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써내야하는 시험 특성상 어떤 펜을 가지고 들어가는지는 당락을 가를 수 있다. 적어도 핑계를 찾는 고시생에게는 그러했다. 펜은 무기고, 좋은 무기는 나를 승리로 이끌어줄테니까.

 

내가 썼던 펜은 동아 u-knock 0.5mm였다. 유행하는 펜은 2-3가지 종류였는데 일제 펜이 좀 더 인기있었고, 만년필을 쓰는 소수파도 있었다.

 

동아 유노크 0.5mm는 일단 싸서 좋았다. 그래봐야 500원 남짓이면 펜 한자루고, 펜 하나를 다 쓰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리기 때문에 얄팍한 고시생의 지갑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비싼 펜을 쓰는 건 개운치가 못했다.

 

그리고 0.5mm가 글을 빠르게 쓰기에는 적합했다. 너무 두껍거나 너무 얇으면 적당한 글쓰기 스피드를 유지할 수 없다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만큼 펜에 민감했던 시기가 없었다.

 

취업을 하고 펜을 쓸 일이 드물었다. 다이어리에 지시사항을 메모할 때 말고 펜으로 일하는 업무는 드물었다. 바로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면 썼지, 펜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펜을 그 때 그 때 적당히 쓰는 게 일이었다.

 

가끔은 멋진 만년필을 사서 가지고 다닐까도 생각해봤지만 서명할 일도 별로 없는데 그건 의미가 없었다. 만년필은 관리도 어렵다.

 

그러던 중 잘쓰던 0.5mm 펜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볼이 잘 안 굴러가는 것 같고, 막 휘갈려 쓰는데 0.5mm로는 선이 부드럽게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0.5mm에 정을 뗄 때인가. 0.7mm 펜을 구했다.

 

좀 더 굵은 펜은 좀 더 부드럽게 써졌다. 날려써도 끊기지 않고 선이 이어졌다. 이제 제한된 분량에 많은 글을 우겨넣어야 하는 시험은 안 쳐도 되니까 0.7mm 펜도 쓸만했다.

 

0.7mm 펜으로 교체한 김에 메모지도 리걸패드로 바꿨다. 이면지를 메모지로 썼는데 어딘지 일을 허접하게 한다는 느낌이 나서다. 내가 실제로 일을 허접하게 할지언정 이미지라도 개선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노란색 리걸패드를 메모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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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8. 7. 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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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집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곱창을 구워먹고 있었다. 여름답지 않게 선선한 날씨라 야외인데도 견딜만했다. 숯불은 뜨거웠지만 바람이 식혀주었다.

 

곱창집 옆은 피자가게였다. 프랜차이즈 피자가게였는데 우리 옆쪽으로 배달오토바이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고, 피자배달원이 배달출발을 기다리며 그 근처에 있었다.

 

핸드폰을 보는 게 일반적이었고, 오토바이에 앉아서 쉬거나 담배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곱창을 굽고 있던 내 눈에 낯선 풍경이 보였다.

 

한 피자배달원이 책을 읽고 있었다. 왔다갔다하는 다른 사람들을 피해가며 책을 읽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데 요즘 나오는 책의 편집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 더욱 궁금했다.

 

피자배달을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다니. 대체 무슨 책이길래 저 빨간 모자를 쓴 피자배달원은 저렇게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일까.

 

곱창을 구우면서 힐끔거리다가 그 책의 표지를 보았다.

 

방법서설이었다. 1990년대에 많이 보던 표지디자인이었다. 어차피 고전이니 최신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이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방법론적 회의를 고찰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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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8. 2. 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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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동네에 두부가게가 생겼다. 두부를 가게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체인점 형태였다.

여기서 두부가게를 한다고? 수익을 낼 수 있나? 한 모에 4,000원 정도 하는 두부를 몇 모 팔아야 되는거야? 저기는 가게세도 비싼 곳인데. 두부가게를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가게를 유지하기는 하나보다. 동네 두부 맛집으로 소문나 줄을 엄청 서서 사다먹는 가게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조금씩 손님들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우리도 몇 모 사다 먹었는데, 동네 슈퍼 두부와는 차원이 다르구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별성은 없다는 말이다.

어젯밤 두부가게(a)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같은 상호의 두부가게(b)가 생긴다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가게를 옮긴건가. 이 쪽이 세가 좀 더 싸서 옮겼다고 보기에는 생긴지 몇 달 밖에 안되었다. 인테리어 비 등을 고려하면 임차기간이 끝나기 전에 옮길 일은 없을텐데, 장사가 안되어서 폐업을 하면 모를까.

여러 의구심으로 간판을 보니 'x두부x 본사직영점'이라고 되어있었다. 본사직영점? 두부가게(a)는 체인점이었던 것 같은데 뭐지?

호기심으로 두부가게(a)자리에 가봤다. 여전히 두부가게(a)가 영업중이었다. 그런데 두부가게(a)의 상호가 'x두부x"엥서 'x콩'으로 바뀌어있었다. 인테리어는 그대로인데, 간판과 상호만 바뀌었다.

오호라, 두부전쟁의 시작인가.

내가 추측한 전쟁 시나리오는 이러하다.

두부가게(a)와 본사 간 갈등이 있었다.  

지점이 나 가맹점 안해, 다른 데가 더 싸고 좋구만 하면서 프랜차이즈를 갈아타버린 상황인 것 같다. 본사는 너 한 번 해보자는거냐 하면서 근처에 본사직영점을 낸 거고.

 

(프랜차이즈 본사와 지점 간 갈등은 대체로 식재료 공급과 관련있다. 식재료를 너무 비싼 값에 가져와야 한다든가, 식재료의 품질이 문제된다거나 아니면 식재료를 지점에서 임의적으로 갖다쓰는 경우가 그렇다. 본사는 식재료 납품에서 돈을 버니까 통제하려 하고, 지점은 아니 저기서 사면 20% 싼데 왜 본사에서 식재료를 납품받아야 하냐는 갈등이 종종 있다. 거기에 본점은 퀄리티 유지, 사고 발생 방지 등을 이유로 내세우고, 지점은 본점의 폭리를 문제삼는다.

 

갈등이 생겼을 때 보통은 본사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계약서는 폼으로 쓰는 게 아니고 계약서에는 본사에서 납품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으니까. 지점이 보기에 너무 부당한 계약이라고 생각해서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일명 '갑질 횡포'로 신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성공할지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안그래도 두부가게가 되기 어려운 상권인데 두부가게가 2개가 되었다. 두부가게(a)는 몇 달 먼저 생기긴 했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두부가게(b)는 두부가게(a)를 저격하기 위해 들어왔고, 아무래도 본사직영점이니까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하다. 치열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내막을 모르니 어느 가게가 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겉보기에는 두부가게(a)가 본사의 횡포에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까보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두부전쟁은 어떻게 결론이 날까? 그리고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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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7. 4. 2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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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나온 최근 보고서 'How do education and unemployment affect support for violent extremism? / Brookings Institution '에 따르면,

 

교육을 받았음에도 실업 상태인 경우 급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보고서 자체는 급진주의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찾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이고. 이 보고서의 조사대상은 아랍국가였다. 즉, 미국에 위협이 되는 아랍 급진주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연구한 보고서이다)

 

보고서의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의 연구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 발전이나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대가 좌절된 경우,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급진주의에 빠질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결론인데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봐도 이런 모습은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난인 홍경래의 난을 보면, 신분적 한계로 인해 출세를 할 수 없는 평민 지식층이 서북 지방에 대한 오랜 차별로 쌓인 불만을 바탕으로 난을 일으킨 사건이다.

 

근래에 들어서 일제시대 때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사회주의 혁명에 경도되었던 것도 이와 같은 궤로 읽을 수 있다.

 

혁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에 대한 불만-비판은 주로 그동안 쌓아온 노력이 보답받지 못할 때 싹튼다.

 

경제성장기에는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크게 대우받을 가능성이 높다.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개인의 노력, 실력, 운에 따라 차등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자기가 노력에 따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경제안정기에는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러한데, 전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세대가 직장을 구하기조차 힘들다.

 

아직 우리나라는 급진주의까지 치닫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와 같이 교육-취업의 불일치가 계속된다면 사회불안 요소가 될 우려가 있다.

 

당장 좋은 일자리를 양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은 일자리를 두고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교육-취업의 불일치가 가져올 사회불만을 어떻게 조정, 통합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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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7. 1. 1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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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는 회귀다. 회귀란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 다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소재로 환생, 이세계 이동, 이세계 이동 + 환생 등이 있다.

 

회귀는 보통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를 하는 시점의 주인공에게 일어난다. 일만 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중년 가장이라든지, 재능은 있었지만 노력을 안하다가 혹은 부상으로 절정기를 날려버린 운동서수라든지.

 

회귀 후 소설의 진행은 비슷하다.

 

일단, 놀라고(아니 내가 이렇게 뽀송한 피부를?  or  아픈데가 없어???)

 

현실을 받아들인 뒤(이게 말로만 듣던 회귀인가?)

 

현 시점과 상황을 파악한다(내일이 입대라고?)

 

그리고 회귀의 이유를 생각해본 뒤 (그 때 걔를 안 만났어야 해!!)

 

제대로 된 삶을 산다(우와, 성공했다)

 

회귀 소재의 웹소설 중 추천할만한 것은 비따비가 있다. 대기업에서 잘 나가다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중년의 상사맨이 주인공이다. 위의 진행과정을 재밌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보여줬다.

 

와이프와 같이 비따비를 재밌게 읽은 후, 내가 회귀를 하면 언제가 좋을까, 회귀를 하면 뭘 하면 좋을까 라는 공상을 했다.

 

결론은, 회귀를 해도 딱히 할 게 없다는거다.

 

둘 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고, 괜히 과거로 갔다가 지금까지의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한다는 것을 끔찍해 했다.

 

(와이프 : 애 둘을 낳아서 언제 키워?)

 

기껏 생각한 게, IMF 때로 돌아가 주식이나 좀 사두고 여유있게 살자, 시험을 더 빨리 붙으면 좋지 않았을까 정도다.

 

회귀한다 해도 딱히 할 게 없는 삶이라니.. 좋은건지, 나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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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6. 10. 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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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캠페인의 내용으로 직접흡연의 위험과 간접흡연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일까?

 

 

한 연구에 따르면 누구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바탕으로 설득하는 게 더 낫다고 한다.

 

병원 화장실에서 손을 더 잘 씻도록 설득하기 위한 캠페인에서

 

"손을 깨끗이 씻으면 당신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vs "손을 깨끗이 씻으면 환자들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어느 쪽이 더 손을 잘 씻게 만드는지를 조사한 결과,

 

환자들의 질병감염을 막아준다는 홍보문구를 붙인 쪽이 더 성과가 좋았다. 10퍼센트 더 손씻는 것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 오리지널스, 애덤 그랜트, 280p -

 

 

이유는 이렇다.

 

자신에 대한 영향을 바탕으로 설명하면, '난 괜찮아, 실제로 병에 걸린 적도 없잖아' 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 즉 비용/편익의 문제-

 

타인에 대한 영향을 바탕으로 설명하면,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뀐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영향은 감수할지 말지를 본인이 결정하게 되니까, 귀찮은데 아프고 말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이 아픈 게 내 책임이 된다고 생각되면 행동을 바꿀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에 바탕할 때

 

금연캠페인은 간접흡연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너 담배피면 폐암걸리고, 나중에 고통스러워. 라고 하면, 에이 담배 피우다 죽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너 담배피면 네 아이가 폐암걸려 라고 하면 금연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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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5. 12. 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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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는 남자의 로망을 담았다. 딸바보라는 말이 있듯이, 딸을 잘 키우고 싶은 남자의 소망을 게임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노골적이지 않나. 프린세스 메이커라니.

 

설정도 철저히 남자의 시각에 맞춰져있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딸을 잘 키우라는 도입부부터. 딸과 아빠의 인터렉션으로 흘러가는 구성까지.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는 남자의 로망에 힘입어 후속편도 여러 개 나왔다.

 

한때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의 유저로서, 그리고 지금은 딸과 아들을 키우는 아빠인 나를 바라보면, 나는 '애늙은이 메이커' 실사판을 찍고 있는 것 같다.

 

애늙은이라... 어린이답지 않게 성숙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애답지 않게 행동하고 말하는 아이, 그게 나였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키웠던 건 아닌 듯 싶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키우신 건 아닌 것 같고, 나의 타고난 재질과 주변환경이 그렇게 이끈 것 같다. 맞벌이인 부모님 밑에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혼자 밥 차려먹고 놀던 그런 환경 말이다. 부모님이 일일이 챙겨줄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마인드가 형성되었달까. 아이처럼 굴어봐야 봐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데 나는 의도적으로 애를 애어른으로 키우고 싶었나보다. 내가 외동아들이다보니 주변에서 애를 키우는 것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아는 애라는 것은 떼쓰고, 애교부리고 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어렸을 때의 나를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나보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떼쓰거나 막 울거나 하는 것을 절대 가만히 보지 못했다. 달래거나 어르거나 하는 대신에 엄격하게 혼냈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니까. 잘못된 거니까. 나는 그렇게 안 컸으니까.

 

발버둥치거나 어른들 있는데 와서 끼어들거나, 아니면 온갖 사건사고를 저질르거나 하는 꼴을 못봤다. 너는 왜 그렇게 부산하니, 얌전히 책이나 보고 있지, 어디 아빠에게 와서 떼를 쓰니. 난 내가 밥 다 차려먹었는데 너는 왜 주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거니.....

 

아이에게 나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었다. 애늙은이를 만들고 싶었나보다.

 

그러다 내가 깨달은 것은 아이는 아이만의 모습이 있다는 것과, 아이의 타고난 개성은 나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내가 억지로 애늙은이로 키우려고 해봐야, 나중에 가면 반발이 심해질거라는 거. 그리고 그게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스트레스가 될 거라는 점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나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아이의 타고난 모습대로, 까부는 아이는 까불고, 노는 아이는 놀고.

 

그렇게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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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5. 11. 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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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지도 1년 가까이 되어간다. 옛 동네와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데도 새 동네는 새 동네다. 틈틈이 동네 구경을 하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익히지만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넓다.

 

이사와서 동네 단골집을 하나하나 찜하고 있다. 슈퍼, 빵집 등등. 아직 치킨 단골을 못 찾았다는 게 흠이긴 한데, 워낙 치킨 취향이 까다로운지라 여기저기 방황중이다.

 

하루는 밤산책을 하다가 익숙한 상호의 간판을 발견했다.

 

"xx 막회"

 

응? 저거 예전 동네에 있던 집인데?

 

하고 찾아보니 얼마 전에 이 동네로 이전했나보다.

 

그 막회집은 예전 아파트 건너편에 있었다. 우연히 그냥 막회가 좀 먹고 싶어서 들어간 집인데 쏠쏠했다. 막회 소짜를 2만원에 팔았는데, 그거 하나면 둘이서 소주 한 잔 하기 좋았다. 특별한 쓰끼다시가 없어도 회 자체만 먹기에 좋았던 집이다. 가성비가 좋았다. 회를 즐겨 먹지는 않지만 한번씩 생각날 때 먹기 좋은 동네횟집이었다.

 

그 집이 새 동네에 왔다니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막회 소짜나 하나 먹어야지 하고 포장을 부탁했다. 그리고 가게 안을 쓰윽 돌아보는데, 막회 소짜가 35,000원이란다.

 

응? 그러고 가만 실내를 둘러보니 예전에 갔던 그 동네횟집 분위기가 아니다. 같은 집이 재개발 때문에 옮긴 것인데도 상호만 빼고 같은 구석이 없었다. 동네횟집 시절에는 허름한 외관에 실내도 포장마차처럼 그런 분위기였다. 오다가다 들러서 소주 한 잔 기울이기 좋은 집이었다. 방도 따로 없었고, 테이블 서너개와 마루에 테이블이 또 몇 개 있는 그런 곳이었다.

 

새로운 횟집은 번듯했다. 새로 오픈을 했으니 집기 등 실내가 반짝반짝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방도 여러 개 생기고, 수족관도 엄청 커켰다. 수족관에는 못보던 생선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고, 벽에 붙은 메뉴판에도 제철 xx 같은 비싼 것들이 적혀있었다. 그 제철 xx는 가을전어같이 누구나 그 때가 되면 한 번쯤 먹어보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제철 민어 같은 느낌의 메뉴였다.

 

"포장 나왔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막회 소짜를 받아들고 카드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예전에 먹던 막회 소짜의 맛은 그대로였다. 양도 같았다. 특별히 더 추가된 것도 없었다. 쌈장과 간장, 상추. 딱 그때만큼의 차림이었다. 가격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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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5. 8. 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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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발끈하는 지점들을 살펴보니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 인정받지 못하다고 느낄 때 나는 일단 화부터 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육아에서 그렇다.

 

가사분담에 있어 두 아이의 육아는 거의 내가 맡고 있다. 직장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보내면서 아침 저녁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데려오는 것은 내 일이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보니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이들 씻기고, 밥차려서 먹이는 것도 나의 일이다. 칼퇴근이 조금은 힘든 와이프가 7시 넘어서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밥을 먹고 있거나 다 먹은 다음이다. 밥을 먹고 난 후,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 재우는 것도 나의 몫인 경우가 많다. 공부도 내가 가르치니까. 이쯤 되면 거의 육아는 내 담당이다.

 

가끔 회식을 하거나 약속을 잡을 일이 있으면 사전에 와이프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애들 야간 맡길테니까 당신이 와서 데려가. 갑자기 당일날 잡히는 약속일 때는 와이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와이프는? 특별한 연락없이 늦을 수 있다. 약속이 갑자기 생긴다 해도 말만 하면 된다. 육아의 책임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육아를 내가 주로 전담하는 거 자체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와이프가 요리와 청소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으니까.

 

문제는 이러한 내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다고 느낄 때다. 와이프의 허락을 받아야만 술 한 잔 할 수 있는 현실에 폭발할 때도 있다. 아니 왜 나만 이래야 하냐고. 자기는 맘대로 늦게 오고 그러면서.

 

더한 경우는 아이들과 싸우다가 내가 열받았을 때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상당히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데, 아이들이 "아빠는 맨날 화만 내고" 이렇게 나오면 두 배로 폭발한다. 육아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맨날 아이하고 붙어있는 사람이 더 화를 내고 잔소리를 심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 집에서는 나인거고, 와이프는 상대적으로 화낼 일이 적다. 뭘 같이 있어야 화를 내지. 그렇게 아이들과 충돌하고 나면 극도의 스트레스가 엄습한다. 아씨, 내가 애들한테 나쁜 아빠라는 소리 들어가면서 이 짓을 해야해? 내 시간이라는 것은 없이 사는데,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해? 같은.

 

이런 사건들이 몇 번 터질 때 나를 관조해보면 요즘 인정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그게 도화선이 되는 것 같다.

 

육아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일에서도 그렇다. 내가 이만큼 희생을 하는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지. 내가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데 왜 아무도 몰라주지 같은. 아 저 뺀질거리는 녀석은 똥만 싸고 도망가 버렸는데, 왜 내가 그 똥을 다 치워야 하냐고. 누군 할 줄 몰라서 이러고 있냐.

 

인정욕구가 위험한 건 내 삶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거다.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서 누가 조금이라도 "아우 잘했어" 이러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헥헥거리게 될 위험이 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요즘 어쩌다가 이렇게 인정잔고가 바닥에 내려오게 되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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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
하루하루2014. 9. 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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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안목이 있다고 생각했다. 왠만한 사람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해도 밀리지 않을만큼 책을 읽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책을 골라내는 능력이 생겼다고 여겼다. 바로 옆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빌려볼 수 있게 된 뒤에는 그 능력에 만족했다. 일단 여러 권을 빌리고 몇 페이지 쓱 읽어보는 것만으로 좋은 책을 가려낼 수 있다고. 이 많은 책 중에서 좋은 책만 가려서 읽게 되었다고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의심이 들었다. 이거 내가 정말 좋은 책을 골라내고 있는건가. 내가 고른 책이 정말 괜찮은 책인거야? 매년 best책을 선정해서 공표하는 것은 그런 의심을 타파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내가 꼽은 책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면서, 내 안목을 검증하려 한 것이다.

 

그 해의 best 책을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면, 어라, 내가 왜 이런 책을 best로 꼽았지 라고 할 때가 있다. 뭐, 독서는 책과 나의 대화이니, 달라진 내가 예전의 책에 똑같은 감정을 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말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다. 그 순간 그 사랑이, 그 독서가 그 당시의 내게 best였으면 족한 것이다.

 

문제는 꼽아놓은 책들의 스펙트럼이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쉬운 책, 소설 같은 것의 비중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조금이라도 어려운 책은, 이 책 잘 못 썼구만 하고 던져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 독해력이 미치지 못한 것인지, 책이 잘못 쓰여진 것인지.

 

이것은 독서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에 내 행동을 가만가만 반추해보면 내 시야, 내 마음의 스펙트럼이 좁아지고 있는 것 같다. 어느새 8년차 직장인이 되니, 그 직장인의 시야에 함몰되고 있음을 느낀다. 자기변명적이고, 조직수호적인 껍질이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버럭 하고, 내 기준에 맡지 않으면 저건 잘못된거야 하고 던져버리는 일들 말이다.

 

계급장 떼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내가 추락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껍질을 깨야한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 하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방법은 하나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새로운 상황에 나를 던져넣고. 특히나 내가 가진 특권이 먹히지 않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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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