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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4 달마야 놀자 - 조폭영화, 한국불교에 고한다 1
각종문화2009. 2.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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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야 놀자
감독 박철관 (2001 / 한국)
출연 박신양, 정진영, 박상면, 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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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야 놀자'는 우리 영화의 흐름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이다. 한국영화계를 관통한 주요코드인 '조폭'을 수용하면서도 불교라는 전혀 상반된 정신적 흐름을 타고 있기도 하다. 제목에서부터 '불교'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으며 영화내용 곳곳에도 불교의 색채가 드러난다. 조폭과 스님의 대치구도에서 이질적인 두 집단간의 갈등은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스님과 가장 대립적인 조폭을 통해 불교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조계종에서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 불교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전격적으로 협력하였다 한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달마야 놀자' 속에 숨어있는 불교 코드를 짚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선불교에서는 선문답이라고 해서 저게 뭔 말이야 싶은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전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특성은 더욱 뚜렷하다. 논리적인 연관 속에 성경에 근거하여 딱딱 맞아떨어지는 교리를 가진 기독교와 달리 불교에서의 가르침은 불경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측면이 강하다.

 스승이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는데 불과한 것이며 종국에는 수도자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물론 종교에서의 논리성과 합리성이란 다른 학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믿음과 복종,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사이에 상대적인 논리성, 합리성 비교는 가능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불교보다 상대적으로 논리적 연관성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염화시중(염화미소)라는 말은 이런 불교의 특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달마야 놀자 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찾겠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냥 허허 웃으며 넘어가기만 해서는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서툰 손길로나마 더듬더듬해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각종 영화 리뷰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은 바로 조폭과 스님과의 대결 씬이다. 산에 머무르려는 조폭과 나가게 하려는 스님과의 대결은 마지막으로 주지스님에 의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 라는 것으로 결판나게 된다.

 속담이 상징하는 바대로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깨어진 부분을 다른 것으로 막으면 안된다는 조건까지 걸려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 때 스님들은 주지스님이 자신들을 이기게 하기 위해 이런 내기를 하시게 한 것이라며 기뻐한다.

 스님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굉장히 현학적이며 철학적인 것이다. 한 스님이 독 안에 들어간 뒤에 '이 마음이 물이요, 이 몸이 곧 물입니다. 독 안에 제가 들어왔으니 이는 독에 물을 채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멋드러져보이는 대답에 주지스님은 진짜 물을 채우라 그랬지 언제 그런 짓을 하라고 했느냐고 타박한다.

 이에 조폭들은 밑빠진 독을 연못에 던져 물을 채워버리고 대결의 승자는 조폭들이 된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할 것이다.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밑빠진 독이라는 것은 번뇌의 사슬과 인연의 고리에 얽매여 있는 중생을 의미한다. 이런 번뇌와 고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중생은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하더라도 밑빠진 독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스님들처럼) 철학과 현학의 세계에 빠져들어 경전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도는 공부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인연과 번뇌의 고리를 끊어버려야 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순간(=독이 물에 빠지는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독을 물로 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묵언 수행을 몇년째 하던 스님이 369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조폭들의 실수를 지적하려고 묵언 수행을 깨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묵언수행이 깨진 스님은 엄청난 수다쟁이가 된다. 이런 설정은 영화 후반부에서 쓸만한 웃음장치로 쓰인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연출된 아이러니한 상황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대결에서 계속 지게 되자 한밤중에 스님들이 모여 대책회의 비슷한 것을 한다.

 그때 묵언수행을 하던 스님이 자기는 묵언수행까지 깨가며 이기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거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 슬그머니 다른 스님이 이렇게 묻는다. '스님, 묵언수행을 깰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리고는 잠깐의 침묵 뒤에 또다른 스님이 말을 꺼내서 장면이 전환되어 버린다.

 이 대목 예사롭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조폭들이 절에 들어옴으로써 청정한 도량의 평온은 깨져버리고, 묵언수행에서 알 수 있듯히 그동안 스님들이 해오던 수행들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 분노해서 스님들은 조폭들을 산에서 몰라내려고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그런데 묵언수행이 깨진 것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묵언수행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약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스님의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대단한 것이어서 묵언수행이 깨지자마자 수다쟁이로 돌변해버릴 정도다. 이처럼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제약하고 금기시하는 수행을 한다고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묵언수행이 깨진 이유를 생각해보자. 묵언수행은 369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깨졌다.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이 다른 욕망에 의해 깨져버린 것이다. 조폭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이 수행을 해친 것이다. 조폭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절대적인 불안요소가 아니라 삶과 수행 중에 마주칠 수 있는 무수한 고민과 갈등의 하나일 뿐이다.

 즉 조폭이 아니라 하더라도 묵언수행은 언젠가 다른 이유에 의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궁극적으로 깨달음이라는 욕구를 이루기 위해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압한 결과다. 깨달음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번뇌의 씨앗이며 수행에 방해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욕구를 조폭들 때문에 방해받자 이를 제거할 욕심에 묵언수행을 깨게 되는 악순환이 나온 것이다. 이렇듯 묵언수행은 언젠가 깨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조폭에 의해 묵언수행이 깨지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맘껏 발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스님은 깨달음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결과적으로는 깨달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즉 욕망의 부정과 금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묵언수행이 깨졌다하여 뭐라 할 것 없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있다. 자신들을 왜 받아들였냐는 조폭의 질문에 너희가 깨진 독을 물에 던져넣듯이 너희들을 내 마음에 던져 넣은 것이라는 주지스님의 말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조폭들이 불상의 귀를 떨어지게 하는 사고를 치자 스님들이 주지스님에게 달려가 이를 고해바치고 불상에 대한 모독이라고 소리높일 때 주지스님이 '불상이 부처냐? 불상은 그저 불상일 뿐이다. 떨어진 귀는 다시 붙이면 되는거지 뭐에 그리 큰일이냐고 난리를 치는거냐?'라고 호통치는 장면도 있다. 이건 불교의 정신보다는 현실적 이익, 현실적 모습에만 관심이 있는 불교 종단에 대한 경고다.

 결론적으로 곤란을 피해 산사로 달아난 조폭들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단지 자신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내쫓으려하는 스님들의 모습은 종교란 세속과 유리된 신성한 것이며, 세속의 일은 종교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종교란 이런 것인가? 현실세계, 세속에서의 어려움과 고민, 갈등, 방황을 질문하고, 그런 것으로부터의 안식과 평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닌가? 그런데 종교라는 것이, 종교인이라는 사람이 세속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성채에 틀어박혀 깨달음을 구하려 한다면, 과연 그걸 진정한 종교,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는 조폭과 스님과의 대립구조, 산사와 세속이라는 장소의 대립을 통해 산에만 머물고 있는 종교가 세속의 품에 뛰어들어 세속과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이 영화를 그냥 단순한 조폭물 중 하나로만 받아들이거나 한 편의 해프닝을 보여주는 코미디영화라 치부할 수 없게 한다. 얼마나 많은 관객이 이 영화에서 저런 불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 지원한 조계종의 혜안은 놀라울 따름이다. 맨날 쌈박질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를 보니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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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