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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1 주홍 글씨 - 수컷의 욕망으로 꿈꾸던 평화
각종문화2009. 1. 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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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감독 변혁 (2004 / 한국)
출연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 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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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규는 자신만만한 남자다. 자신의 삶과 일 모두를 자신의 생각대로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걸 즐기고 있다. 유능한 형사반장이며, 현모양처형의 아내가 있고, 게다가 섹스 파트너로서의 불륜 상대도 있다. 아내에게도 충실하고, 바람피는 사람에게도 충실하며, 일도 잘하는 거의 슈퍼맨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반성하거나 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세상에 서 있는 이 남자.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

그러나 그의 생각은 헛된 것이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고 있으며, 그 삶이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의지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이 자신만만한 남자가 한 순간 무너져버린다. 그가 딛고 있던 땅이 허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그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자신감의 표현이었던 아리아의 한 대목이 절망의 표현으로 바뀌어버릴 때 우리는 이 남자가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평화, 평화(아리아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 앞서 한석규가 부른 '평화'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수컷의 외침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평화다.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어찌 평화가 아니겠는가. 후자의 평화. 그것은 평화롭지 못한 자. 평화라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배반당한 혹은 자승자박에 빠진 남자가 부르는 평화다. 절망의 평화는 그렇게 좁은 트렁크 속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한 번 무너져버린 수컷은, 욕망은 비겁해진다. 모든 것에 자신만만했던 이 수컷은 금새 단지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동물이 되어버린다. 아기가 되어버린다. 죽고 싶은 그 순간에 수컷은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고 바둥거리며, 스스로 죽을 용기를 내지 못한다. 한석규가 이은주가 죽으려는 것을 말리는 것은, 생명의 고귀함, 사랑과 같은 추상적 이유가 아니다. 그 좁은 공간에 자기 혼자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투정일 뿐이다. 그래서 한석규는 나중에 트렁크에 나와서도 죽으려는 액션만 취할 뿐 정작 죽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다름 사람들이 그를 붙잡지 않았더라도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 수컷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린 존재였는지를 드러낼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죽음을 바로 앞까지 보고서도 죽지 못한 수컷은 이제 이은주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가며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 그건 욕망의 끝에서 허공을 보게 된 수컷이 마지막 남은 생존의식으로 어떻게든 자기 숨을 곳을 찾아가는 불쌍함일 뿐이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욕망만은 남아있던 골룸은 그래도 행복했다. 추구할 욕망이 있었으니까. 욕망마저 잃어버린, 욕망의 끝을 봐버린 한석규는 골룸보다 불쌍하다.

수컷이 상징하는 것은 여러가지다. 폭력, 욕망, 질주 등등. 그것이 충족될 때 수컷은 행복하다, 평안하다. 하지만 수컷의 욕망은 얼마나 단순하며, 그 욕망의 성취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영화는 그것을 보여준다. 수컷의 욕망은 결국 다른 욕망들로 짜여진 거미줄 위에서 놀아나는 하루살이 같은 것이었다. 하루를 영원으로 생각하는 하루살이가, 그 하루마저도 온전히 보내지 못하고 거미줄에 싸여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트렁크는 단순히 짐을 넣어두는 공간이 아니라 욕망으로 불살랐던 삶이 끝을 맺는 공간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한석규의 수컷으로서의 욕망과 이은주, 엄지원의 욕망이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후자 둘의 욕망 또한 수컷의 욕망일 따름이다. 생물학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로서의 수컷. 그 둘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남자를 교묘한 끈으로 얽어매고 그것을 이용한다. 남자의 욕망을 받아주는 척하며 결국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이 둘은 그래서 불쌍하다. 이은주는 유일한 희망인 아이를 잃고, 그것 때문에 받아들이려 했던 죽음을 거부하며 발광한다. 엄지원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애를 지우며, 어떻게든 그 사랑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아야만 한다. 빗나간 욕망을 가진 세 사람은 그렇게 파국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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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