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글들2015. 11. 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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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편지를 많이 받은 편에 속했다.

 

 가장 많은 편지는 아버지께서 보내셨다. 전통적인 괘선 편지지에 볼펜으로 쓰신 편지를 2-3일에 한 통씩은 보내셨다.  부모님께서는 펜팔로 연애 결혼을 하셨는데, 그 때의 연애편지들이 시골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보지는 못했는데 위문편지들을 통해 아버지의 편지 패턴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시작은 국어교과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날씨 이야기이다. 익어가는 가을 풍경과 주변의 경치를 묘사하는 글로 한 페이지를 채우신다. 그리고는 가족의 일을 언급하시고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야구 결과나 올림픽 상황을 편지 말미에 써서 보내곤 하셨다.즉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로 페이지 수를 늘리는 타입이다. 이건 잘만 써먹으면 여러 명의 여자에게 동시에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이다. 앞의 부분을 똑같이 베껴서 보내면 되니까. 낭만적 문장이 적절히 삽입된 만연체는 대체 이 수법으로 몇 명의 여자를 낚으신건가요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 다음은 아내이다. 아내는 알뜰한 재정관리를 하고 있음을 편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군에 있는 남편을 안심시켰다. 동기들의 어린 여자친구들은 쓸데없이 컬러풀하고 이쁜 편지봉투를 사용했는데 이런 봉투는 규격 외로서 추가 요금을 더 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낭비이다. 언제나 규격봉투, 그리고 가끔씩은 회사 로고가 찍힌 회사 봉투를 활용하는 아내와는 대비가 아니 될 수 없다. 또한 편지지 선택에 있어서도 노트 또는 업무용 메모지 등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내용 전달에 충실하는 모범적인 편지쓰기를 보여주었다. 회사 사람들이 - 특히 군대를 다녀온 남자일수록 더 - "꽃편지지를 써야지 뭐하는 것이냐고!!!" 할 때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지조를 보여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반한 my way 정신이다.

 

 한편 공부하기 싫으면 편지 좀 쓰지 라는 성수의 따뜻한 조언에 감격하여 편지를 쓴 이가 있었다. 공식 daughter인 슬이다. 유격에서 돌아와 슬의 편지를 받았을 때 한 번 감동했고, 편지봉투를 뜯었을 때 보이는 노란 종이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의 낭비는 귀여워 보이기만 하는 법 아닌가. 이 녀석이 꽃편지지에 편지를 썼군 하며 흐믓한 마음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익숙한 줄이 보였다. legal pad였다. legal pad 두 장에 빽빽히 써내려간 편지는 한 문단이면 될 것을 끝도 없이 늘어뜨림으로써 고시생으로서 분량 늘리기에 일가를 이룬 모습이어서 애비를 뿌듯하게 하였다.

 

 아내에게 이 사연을 전하고 난 꽃편지지를 받아볼 수 없는거냐며 행복한 투정을 했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허니가 공주과랑은 안 친한거잖아."

 

 그렇다. 꽃편지에 알록달록 색깔펜으로 편지를 쓰고, 비타민 c를 하나하나 포장해서 하트 스티커를 붙이며, 매일 하나씩 먹으라며 피로회복제를 개별 포장해서 작은 쪽지까지 첨부하는 아이들과 나는 친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다수의 동기들이 여자친구로부터 그런 편지와 선물을 받을 때, 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아버지의 흔적과 알뜰한 아내의 모습과 고시생으로 일가를 이룬 딸의 성장을 편지에서 읽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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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