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책들/장르문학2009. 12. 15.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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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야쿠마루 가쿠 (황금가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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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2가지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스릴과 지적 쾌감. 전통적으로는 지적 쾌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초기 추리소설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코넌 도일의 소설을 보면 범인이 누군지를 알아맞추는 것이 포인트였다.

정정당당하게 단서와 복선을 깔고 작가와 독자가 지적 대결을 하는 것이 추리소설이었고, 이를 아예 형식으로 도입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앨러리 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리소설은 점점 스릴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되었다. 이는 영화 등 영상매체의 발달과 맞물리는데, 소설도 영화처럼 빠른 전개와 긴장감있는 몰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매력을 고루 갖추어야 현대 추리소설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근래 들어 우리 나라에 소개된 추리소설 중 두 가지 매력을 공히 갖춘 작품으로는 ‘13계단’이 있다.
 
‘13계단’은 사형제도의 모순을 배경으로 깔고 사형집행이 조금씩 다가오는 죄수의 혐의를 벗기기 위한 과정을 보여준다. 지금 파헤치지 못하면 죽는다.  2가지 미덕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설정이고, 소설은 그 성취를 이루었다.

‘천사의 나이프’도 ‘13계단’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먼저 형사법제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13계단이 사형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면, 천사의 나이프는 소년범 제도에 대한 문제인식을 깔고 있다.

이는 소년범을 처벌할 것인지, 교화할 것인지의 관점의 차이이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년범죄가 점점 흉포해지는 현실에서 소년범 제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를 정면으로 소설 속으로 품은 것이 ‘천사의 나이프’다. 좋은 아이디어다.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어떤가. 이는 두 가지 매력을 잘 구현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먼저 스릴. 13계단은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천천히 조금씩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다. 사건을 제 때 해결하지 못하면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것. 한 단계씩 진행되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 진범을 찾아내 사형집행을 막아야 한다는 긴장감이 대단하다.


그러나 ‘천사의 나이프’는 이보다 못하다. 설정은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갈 만하다. 아내를 죽였지만 소년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던 범인들이 한 명씩 죽거나 위험에 처한다. 당연히 용의자로 몰린 상황.


그러나 주인공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만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코너로 몰리지를 않으니 긴장감이 덜하다. 좋은 설정이지만 살리지를 못했다.


다음 추리. 책의 뒷표지에 나오지만 이 소설에는 3중의 트릭과 반전이 깔려 있다. 게다가 이 트릭과 반전은 작가가 문제적 지점으로 삼은 소년범 제도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문제의식과 추리의 구성이 잘 맞물려진 경우다.


아쉬움이 있다면 3중의 트릭과 반전이 불과 마지막 몇 페이지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휙휙 반전을 연달아 터트리면서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그 효과가 미흡하다. 우와, 그랬던 거야? 라며 탄성이 터지기보다는 그랬던건가... 하는 정도밖에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이는 1차적으로는 드라마틱하게 구성을 끝까지 끌고 가서 터트리는 역량 부족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서 말한 추리소설의 공정한 룰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공정한 룰이란 독자가 추리할 수 있을만한 단서를 적절히 제시하는 것. 반전이 탄성을 자아내려면 반전을 알게 된 다음에 다시 앞 부분을 살펴봤을 때 그 때는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큰 의미를 가지는 복선과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식스 센스’에서 부르스 윌리스가 유령이었음을 알게 된 뒤에 영화를 다시 보면 놓치고 지나간 장면들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사의 나이프에서는 이 점이 부족한데 반전들의 개연성이 떨어져서 시원한 지적 게임의 쾌감을 안겨주지 못한다. 3중의 트릭과 반전을 두고 앞부분을 다시 읽어봐도 이 반전이 꼭 들어맞아서 미처 보지 못한 복선을 발견하는 기쁨을 찾기 어렵다. 반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천사의 나이프’는 ‘13계단’에 비해 5%쯤 부족하다. ‘13계단’의 짜임새와 성취를 온전히 이루어냈으면 하였는데, 문제의식과 구성은 좋았지만 긴장감과 설득력이 부족해서 아쉽다.


정상의 ‘13계단’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럼에도 여타의 일본 추리소설보다는 월등히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은 확실하다. 베스트는 아니지만 베스트 주니어는 분명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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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11. 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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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의자 탐정'이라는 유형이 있다. 사건현장에 가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내용만 가지고 추리를 하는 탐정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 사람좋은 할머니는 시골마을에 사는 평범한 노파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삶과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버린다.

 미스 마플의 대표작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서 안락의자 탐정으로서의 미스 마플의 진가가 잘 드러난다.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자신이 겪은 신기한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모임이 있다. 이 얘기를 듣고 자기가 사는 시골마을 세인트 메어리 미드에서 있었던 일에 견주어 "세상만사 다 똑같은거야"라며 해결하는 미스 마플의 모습은 안락의자 탐정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화요일 클럽의 살인(애거서크리스티추리문학베스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출판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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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컬렉터의 링컨 라임도 안락의자 탐정이다.

본 컬렉터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프리 디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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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목 윗부분과 왼손 약지만 움직일 수 있어 안락의자 탐정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덴젤 워싱턴 (Denzel Washington Jr.) / 외국배우
출생 1954년 12월 28일
신체
팬카페 ★덴젤 워싱턴★을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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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본 컬렉터'에서는 덴젤 워싱턴이 링컨 라임을 연기했는데, 소설에서 링컨 라임은 백인이다


 그는 한때 오만한 천재 법의학자였다. 사건 해결에만 관심있는 독불장군. Dr. House에 비견될 까다로운 이 남자는 사고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죽음을 원하고 자살을 꿈꾼다.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그에게 오랜 동료가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해결을 부탁하고, 조언만 조금 해주고 어서 죽으려던(?) 그는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렸던 수사열정을 찾게 된다.

 이렇게 첫 모습을 드러내는 안락의자 탐정 링컨 라임은 엣 동료와 새로이 그의 파트너가 되어 눈과 발이 되어주는 젊은 여경찰 아멜라이 색스가 가져오는 정보와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CSI를 떠올리게 하는 법의학의 향연과 독특과 캐릭터의 매력이 생생한 본 콜렉터는 링컨 라임 시리즈의 1편이라는 점에서 더 기분좋은 깔끔한 스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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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10. 1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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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중사영(杯中蛇影)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나라 때의 일이다. 악광이라는 사람에게는 벗이 한 명 있었다. 자주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언제부터인지 오지 않았다. 악광이 기이하게 여겨 친구를 찾아갔더니 얼굴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친구가 대답했다.

 "전에 술을 마실 때 내 잔 속에 뱀이 보였다네. 자네에게 말을 할 수는 없고 그냥 마신 후에 몸이 안 좋아졌네"

이상하여 조사해보니, 그 때 술자리에는 뱀이 그려진 활이 벽에 걸려 있었고, 그 뱀그림이 친구의 술잔에 비쳤던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해주니 친구의 병이 나았다.

 배중사영이란 아무 것도 아닌데 혼자서 근심 걱정을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고사성어가 잘 어울리는 소설이 있다. 심플 플랜이다.

 
심플 플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스콧 스미스 (비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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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스미스의 데뷔작인 '심플 플랜'에는 스티븐 킹이 적극 추천한다는 홍보문구가 표지에 써있다. 스티븐 킹, 좋은 작가지만 좋은 추천인은 아닌 것이, 그의 추천이라는 말에 속아서 실망한 소설이 어디 한 두 개 였냐는 말이지.

 그렇지만 여기저기에서 좋다는 리뷰가 보이길래 한 번 읽어보았다. 과연 좋았다.

 심플플랜의 설정은 단순하다. 여기 별 볼 일 없는 소시민이 있다. 우연히 비행기 잔해에서 4백4십만달러를 발견한다. 혼자 발견했으면 좋았겠지만 사고뭉치 형과 더 사고뭉치인 형의 친구와 같이 발견했다. 이 철없는 두 사람은 바로 돈을 쓰자고 아우성이지만, 바로 쓰면 잡히는 법. 6개월만 숨겨뒀다가 돈을 나누기로 한다. 단순한 계획. 단순해서 실패할 리 없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돈은 욕심을 부르고, 욕심은 불신을 키운다. 원래도 믿지 못했던 형. 가까이하기조차 싫은 형의 친구. 그는 믿지 못할 두 사람 사이에서 돈을 가진 기쁨과 돈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에 심플 플랜을 조금 수정하기로 한다. 

 아주 조금. 보다 완벽해지기 위한 수정이었지만, 이미 뱀을 봐버린 주인공은 파국으로 빠져든다. 

 실제로 주인공을 위협하는 사람은 형과 그 친구 뿐이다. 그 위협도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다. 다독일 수 있고, 제어할 수 있지만 술잔에서 뱀을 봐버린 주인공은 자신을 돕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고, 피를 나눈 형조차 믿지 못하고, 작은 사건을 숨기기 위해 더 큰 사건을 저지르는 저주의 뫼비우스 띠를 그려나간다.

 
 심플 플랜에서 소름끼치는 묘사나 잔혹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죽음은 나오지만 그 묘사는 심플하다. 무서운 것은 그 죽음이 발생하기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심리다. 단순한 계획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여 주인공을 옳아맬 때 조금씩 미쳐가는, 조금씩 무너져가는 주인공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정말 저렇게 될 수 밖에 없겠다 싶은 절망과 공포가 마음속에 파고든다. 

 
 책장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번 무너졌으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끝까지 파고드는 저자의 필력에 내 눈에도 뱀이 씌어버린다.

 스멀스멀 스릴러 - 심플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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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7. 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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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무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프리 디버 (비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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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된 일이다. 친구와 함께 비디오방에 갔다가 아무 생각없이 영화를 하나 골랐다. 남자끼리 시간이나 때울까 해서 간 것이라 대강 고른 영화가 정말 재밌었다. 개봉작인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유명한 배우도 아닌 것 같은데 몰입하게 하는 영화였다.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재밌는 오락영화, '네고시에이터'였다. (그 때는 케빈 스페이시와 사무엘 잭슨이 와닿지 않았었다)

 '네고시에이터'는 인질극이다. 인질을 잡고 있는 범인과 협상만으로 이를 구출해내려 하는 협상가의 대결을 다룬 영화다. 인질하면, 특공대 투입해서 우당탕탕 때려잡는 것만 생각나는데 한 발 한 발 조금씩 잽을 주고받으며 인질을 구출해내는 협상의 묘미를 깨닫게 해준 영화다.

 그런 인질협상의 맛을 다시 느끼기는 어려웠다. 인질극은 그 자체로 긴장감 주는 데는 최고의 재료이지만, 손질하기가 까다롭다. 어느 정도 긴장감을 몰아넣기는 좋다. 범인이 인질을 잡고 있고,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걸 어떻게 풀건데. 무조건 인질이 죽어나간다고 해서 긴장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잖나. 그리고 결국 인질이 풀려나야 할텐데,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말이 되게, 해피엔딩으로 끌고 가는 건 여간 애먹이는 게 아니다.

 그런 성취를 이룬 작품이 '소녀의 무덤'이다. 농아학교의 학생과 교사를 태운 버스가 탈옥수들에게 탈취된다. 그들이 인질을 끌고 향한 곳은 폐 도축장. FBI의 협상 전문가 아더와 그의 팀이 투입되지만 탈옥수 루 헨디 등 일당은 만만치 않다. 타고난 잔인함이 수차례의 범죄를 통해 벼리어져 백전용사가 된 루는 정확한 타이밍에 날카로운 칼을 찔러대고, 수많은 경험으로 인질협상을 꿰뚫고 있는 아더는 그 칼날에 치명상을 입지 않으려 슬쩍슬쩍 피하며 응수한다. 

 언제든 인질을 죽일 수는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죽여야 함을 아는 루 헨디
 모든 인질을 구하면 좋겠지만, 인질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함을 아는 아더

 두 고수의 숨막히는 공방이 빚어내는 심리전, 한 순간의 안심도 허용치 않는 청룡열차 같은 스토리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손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드라마틱한 구성까지. 인질협상극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좋은 스릴러가 담아야 할 장점을 두루 갖춘 멋진 인질스릴러.

소녀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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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6. 2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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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효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요코야마 히데오 (노블마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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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당황했다. '제3의 시효'가 재밌다고 해서 집어들었는데 첫 장에서 얘기가 끝났다. 어라? 두 번째 장의 제목이 '제3의 시효'였다. 잠깐, 이거 뭔가 이상한데. 장 제목이 책 제목일 리는 없잖아? 단편집이었다.

단편집인 줄도 모르고 재밌다고 해서 읽게 된 소설 '제3의 시효'는 사전정보 없이 재밌다는 말만 믿고 우직하게 읽은 보람이 있었다. 재밌다.

재밌는데 그 재미가 유쾌하거나 짜릿하거나 하는 재미는 아니다. 이건 생생한 수사드라마다. 형사들의 땀이 녹아있는 진실된 사건일지다. 살인의 추억을 생각하면 될거다. 사건이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인 형사들이 관할에서 일어난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 고뇌하고, 아파하며, 분노하는 형사들이 날선 기지로, 예리한 시각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다.

형사들의 땀만 배어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숨은 진실은 교묘하고, 그걸 밝혀내는 형사의 수법은 더욱 교묘하다. 단편이라 복잡한 수법은 아니나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기지와 반전이 수려하다.

대표작 제3의 시효는 공소시효를 활용한 트릭이다. 공소시효는 어떤 죄를 벌할 수 있는 유효기간 같은 것. 그 기간 이후에는 죄가 있어도 벌할 수 없는 제도다. 이를 악용해서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버티며 숨어다니는 범죄자가 있다.

그런 범죄자를 정의의 법정으로 낚아채려는 형사의 트릭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겹겹이 쳐진 교묘한 그물로 범죄자를 유혹하는데...

두껍지 않은 책에 짤막한 단편이 이어진다. F현을 배경으로 형사들의 경쟁과 갈등, 사나이의 정을 그린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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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5. 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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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10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좋은 법정 스릴러는 드물다. 그건 태생적 한계다. 좋은 스릴러도 드문데 법정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조건이 추가되면 걸려드는 게 줄어든다. 모집단이라도 크면 모르겠지만 스릴러 장르는 큰 시장이 아니다.

 스릴러는 긴장을 주는 장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미를 주는 장르다. 히히덕거리며 웃는 재미가 아니라 조였다 풀었다 하는 재미다. 이게 쉽지 않다. 팽팽항 긴장을 유지한 채 몰입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여기에 법정이 추가되면, 와우, 법정이라는 게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정된 공간에서 말빨로만 충돌하는데, 어려운 법용어까지 들어가니 능수능란하게 쥐었다 놓았다 하기에 좋지 않다. 좋은 법정스릴러가 되려면 사전에 포석을 잘 깔아두었다가 법정에서 그것이 단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선보이면서 결론으로 치달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스릴러로 흔히 분류되는 존 그리샴은 좋은 스릴러일지는 몰라도(이것도 의문이 좀 가지만) 좋은 법정스릴러는 아니다. 변호사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활약하는 이야기지 법정에서의 공방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표작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를 보자.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존 그리샴 베스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존 그리샴 (시공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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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 변호사가 좋은 조건의 로펌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범죄집단의 하수인 격이었고, 입막음당한 채 평생 불안에 떨며 부를 누릴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이러 저러한 활약으로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어디에 법정이 나오냐고. 존 그리샴 소설은 영화로 만들기는 좋지만 법정스릴러는 아니다.

 그런 희귀하고도 어려운 장르인 법정 스릴러에 모처럼 좋은 소설 하나가 번역되었다. 마이클 코넬리의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보기 드물게 법정에서의 공방으로 독자를 쥐락펴락한다.

 그건 철저한 사전포석으로 법정공방에서의 대사 하나하나가 빛을 발하게 만든 정교한 구조 덕분이다. 주인공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만 보이던 사건들이 알고 보니 법정 공방을 풍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들이고, 주인공이 맡았었고, 맡고 있는 사건들이 교모하게 씨줄 날줄로 엮어 드라마틱한 반전의 결말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독특한 캐릭터의 주인공이 소설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최고급 링컨 차를 굴리는 이 변호사는 제도와 법의 허점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 줄 아는 유능하지만 타락한 변호사다. 돈냄새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돈 안주면 변호를 그만두겠다고 클라이언트를 을러대는 그의 모습은 정의감에 불타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보다 친숙하고 매력적이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정의의 사자도 아니다.

 그런 변호사가 위기에 빠져 진퇴양난에 처한 절명의 순간에 역으로 함정을 깔고 이중삼중의 지략으로 멋지게 탈출하는 것이 이 소설이다. 타락한 변호사가 정의에 눈을 떠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타락하고 현실적인 변호사가 타락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반전의 법정스릴러라는 점에서 재미와 만족감을 준다.

 한달음에 소설을 읽고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 : 자살노트를 쓰는 살인자'를 집어들었다. 저 매력적인 변호사가 주인공인 소설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이 작가라면 누가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포만감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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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책들/장르문학2009. 4. 1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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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뒷표지에 있는 수준의 스포일러만 있음 *

 

 

노인의 전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존 스칼지 (샘터,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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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인의 전쟁’ 은 흥미로운 설정을 던지는 작품이다. SF라는 게 흥미로운 설정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좌우되는 일이 많은 장르다 보니, 일단 흥미로운 설정을 했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어떤 설정인가?

이 시대에는 우주개척방위군이라는 게 있다. 우주를 개척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군.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서 점령하는 군이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인간보다는 고등한 외계생명체와 최전선에서 맞붙는 군이다.

그런데 우주방위군에는 75세의 노인만 입대할 수 있다. 그것도 사망신고서에 서명해야만. 즉 법적으로는 죽은 사람이 되고 우주로 날아가서 신병이 되는 것이다.

왜 하필 75세 노인일까? 노인을 데려다가 군에서 뭘 시키려는 걸까? 전직 군인이라면 모를까, 군과 관계없던 사람을 데려다가 뭘 할 수 있을까? 뒷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은하의 저편에서, 늙은 우리는 인간 병기로 다시 태어났다”

이처럼 75세 홀애비가 인간병기가 되기까지의 과정, 된 이후의 활약이 ‘노인의 전쟁’의 내용이다.

 

글의 재미는 어떠한가?

재밌다.

75세 노인이라고 하면 인간사 쓴 맛, 단 맛을 다 본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은 같이 우주로 가기로 했던 아내가 죽고, 마지막 모험을 위해 우주로 떠나는 75세 노인이다. 미련이 있겠나, 고민이 있겠나. 그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고, 삶을 즐긴다. 그래서 소설 전반에 유머가 흐른다. 시니컬한 유머가 아니라 툭툭 재치있게 치고 빠지는 유머라서 키득키득 웃음이 난다. 유머가 넘치는 SF라는 점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유사한데, ‘은하수 ~~’ 가 시니컬한 영국식 유머와 온갖 대중문화를 비트는 매력이라면 ‘노인의 전쟁’은 따스하면서도 재치있는 매력이다.

 

더 기쁜 것은 이 소설이 시리즈의 1권이라는 것이다. 후편들은 아직 번역이 안됐지만, 이 매력적인 주인공을 더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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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