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추리소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12.15 '13계단' 보다 5% 부족한 '천사의 나이프'
각종책들/장르문학2009. 12. 15. 23:17
728x90

 

천사의 나이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야쿠마루 가쿠 (황금가지, 2009년)
상세보기



추리소설은 2가지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스릴과 지적 쾌감. 전통적으로는 지적 쾌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초기 추리소설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코넌 도일의 소설을 보면 범인이 누군지를 알아맞추는 것이 포인트였다.

정정당당하게 단서와 복선을 깔고 작가와 독자가 지적 대결을 하는 것이 추리소설이었고, 이를 아예 형식으로 도입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앨러리 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리소설은 점점 스릴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되었다. 이는 영화 등 영상매체의 발달과 맞물리는데, 소설도 영화처럼 빠른 전개와 긴장감있는 몰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매력을 고루 갖추어야 현대 추리소설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근래 들어 우리 나라에 소개된 추리소설 중 두 가지 매력을 공히 갖춘 작품으로는 ‘13계단’이 있다.
 
‘13계단’은 사형제도의 모순을 배경으로 깔고 사형집행이 조금씩 다가오는 죄수의 혐의를 벗기기 위한 과정을 보여준다. 지금 파헤치지 못하면 죽는다.  2가지 미덕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설정이고, 소설은 그 성취를 이루었다.

‘천사의 나이프’도 ‘13계단’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먼저 형사법제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13계단이 사형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면, 천사의 나이프는 소년범 제도에 대한 문제인식을 깔고 있다.

이는 소년범을 처벌할 것인지, 교화할 것인지의 관점의 차이이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년범죄가 점점 흉포해지는 현실에서 소년범 제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를 정면으로 소설 속으로 품은 것이 ‘천사의 나이프’다. 좋은 아이디어다.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어떤가. 이는 두 가지 매력을 잘 구현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먼저 스릴. 13계단은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천천히 조금씩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다. 사건을 제 때 해결하지 못하면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것. 한 단계씩 진행되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 진범을 찾아내 사형집행을 막아야 한다는 긴장감이 대단하다.


그러나 ‘천사의 나이프’는 이보다 못하다. 설정은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갈 만하다. 아내를 죽였지만 소년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던 범인들이 한 명씩 죽거나 위험에 처한다. 당연히 용의자로 몰린 상황.


그러나 주인공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만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코너로 몰리지를 않으니 긴장감이 덜하다. 좋은 설정이지만 살리지를 못했다.


다음 추리. 책의 뒷표지에 나오지만 이 소설에는 3중의 트릭과 반전이 깔려 있다. 게다가 이 트릭과 반전은 작가가 문제적 지점으로 삼은 소년범 제도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문제의식과 추리의 구성이 잘 맞물려진 경우다.


아쉬움이 있다면 3중의 트릭과 반전이 불과 마지막 몇 페이지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휙휙 반전을 연달아 터트리면서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그 효과가 미흡하다. 우와, 그랬던 거야? 라며 탄성이 터지기보다는 그랬던건가... 하는 정도밖에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이는 1차적으로는 드라마틱하게 구성을 끝까지 끌고 가서 터트리는 역량 부족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서 말한 추리소설의 공정한 룰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공정한 룰이란 독자가 추리할 수 있을만한 단서를 적절히 제시하는 것. 반전이 탄성을 자아내려면 반전을 알게 된 다음에 다시 앞 부분을 살펴봤을 때 그 때는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큰 의미를 가지는 복선과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식스 센스’에서 부르스 윌리스가 유령이었음을 알게 된 뒤에 영화를 다시 보면 놓치고 지나간 장면들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사의 나이프에서는 이 점이 부족한데 반전들의 개연성이 떨어져서 시원한 지적 게임의 쾌감을 안겨주지 못한다. 3중의 트릭과 반전을 두고 앞부분을 다시 읽어봐도 이 반전이 꼭 들어맞아서 미처 보지 못한 복선을 발견하는 기쁨을 찾기 어렵다. 반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천사의 나이프’는 ‘13계단’에 비해 5%쯤 부족하다. ‘13계단’의 짜임새와 성취를 온전히 이루어냈으면 하였는데, 문제의식과 구성은 좋았지만 긴장감과 설득력이 부족해서 아쉽다.


정상의 ‘13계단’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럼에도 여타의 일본 추리소설보다는 월등히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은 확실하다. 베스트는 아니지만 베스트 주니어는 분명한 작품이다.


728x90
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