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글들2015. 11. 1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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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이었다.

 

눈앞에서 마을버스를 놓치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내 앞에 한 여자가 있었다. 좌측 길에서 건너와 내 앞으로 걸어가는 여자였다. 긴 생머리에 밝은 베이지색 트랜치 코트를 짧게 입고 있었다. 코트 길이가 적당했다. 코트는 치마 선과 맞추는 것이 보기 좋다. 그녀의 긴 생머리를 옆으로 가로질러 까만 줄이 있었다. 이어폰이었다. 노래를 듣는지, 라디오를 듣는지, 영어공부를 하는지 그런 모습이었다.

 

  발걸음이 느렸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갈 수도 있지만 출근길이고, 다른 여자 뒤를 졸졸 따라가는 취미는 없으니까 앞질러가기로 했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노랫소리가 들렸다. 볼륨을 크게 한 모양이군. 귀에 안 좋을텐데. 근데 누가 부르는걸까. 되게 못 부르네.

 

  그녀가 부르고 있었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흥얼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가사를 똑바로 불렀다. 절창은 아니지만 일요일 오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듯이 부르고 있었다. 화요일 아침 6시 40분. 이른 출근길의 등촌동 발산 주공 3단지 옆길에서.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인기척이 나면 민망해서 노래를 멈추는 게 보통인데, 내가 옆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데도 동요 없이 꿋꿋히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이 넘는 성격의 그녀가 보통이 되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니 멜로디도 가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또박또박 가사전달력이 뛰어난 윤종신도 아니고, 윤종신처럼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윤종신 노래처럼 유명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지도 않고.

 

  궁금했다. 이른 출근길의 그녀를 덥썩 잡고 노래방으로 데려가 당신이 부른 지금 그 노래를 불러보라고 권.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서 지금 부르는 그 노래가 뭔 노래라고 물어볼 용기조차 갖지 못한 ‘강한 소위’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리고 언감생심 소심 소위는 그녀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녀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내일도 모레도,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동네서 마주칠 것 같은데 그 때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봐야 물어볼 텐데. 알아봐야 물어볼 수 있을지는 자신없지만. 의상은 걸치기 나름이니 단서는 생머리와 목소리뿐. 생머리는 자르거나 볶거나 웨이브하거나 나름이니 결국 단서는 목소리뿐.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낫지 목소리만으로 어떻게 알아볼까. 알아본다고 물어볼 수는 없을테니 알아보고 노래를 부르는 지를 확인하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지만.

 

  북한 미사일로 비상걸린 국방부에 있으면서도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노래 듣거든 언젠가 듣거든 궁금해했었던 내 맘을 알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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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