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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4 파리 밤거리를 걸은 네 사람
나다니기/물건너2009. 9. 2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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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 중에 가장 즐거웠던 때는, 즐거워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때는 스위스에서 융프라우를 올라갈 때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전차를 갈아타고 봉우리로 올라가는 그 길은 5월에 눈을 보는 놀라움 때문인지 마냥 기쁘기만 했다. 사진을 봐도 그 때가 가장 해맑게 웃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여행 중에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파리의 밤거리를 걸은 일이다. 아스라히 떠올리면 웃음이 머금어지는 기억이다.

 

그 날은 기분이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비가 오는 몽마르뜨 언덕을 걸어다녔다. 즉석에서 원색의 I LOVE PARIS 비옷을 사입고, 우비소년소녀가 되어 쏘다녔다. 비는 많이 오고, 많이 젖었지만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저녁에는 모처럼 정식 코스요리를 먹었다. 와인을 곁들여서 달팽이도 먹었다. 우리 옷차림은 추레하였으나 음식만은 맛있었다. 그렇게 먹고 나서 세느강 유람선을 타러 갔다. 적당히 알콜을 마신 우리는 유람선 이층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세느강이어서가 아니다. 한강이었어도 그랬을거다. 우리에겐 추억이 필요했고, 연수 마지막의 추억을 심장에 새겨두려면 체면이나 품위 따위는 거추장스러웠다. 그래, 우린 누가 카메라만 들었다 하면 정신없이 그 쪽으로 모여들었고, 제각각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도로 유도했다.

 

그렇게 실컷 상기된 뒤에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편하게 여행을 하더라도 단체여행이 주는 답답함에 목말랐던 우리에게 주어진 감로수였다. 한 방울 끝까지 쪽쪽 빨아먹어야지.

 

일행은 여럿으로 갈라졌다. 파리의 지하철을 타보겠다며 몇이 떠나고, PHAMARCY에서 살 것이 있다며 또 몇이 나뉘어졌다. 숙소로 돌아간 팀도 있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겠다며 간 이도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몇몇은 그냥 무작정 파리를 걷기로 했다. 나, 병성, 유주, 수진.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목적지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걸으면, 마냥 걸어서 파리에 내 신발자욱을 남겨야 파리에 왔다는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우리를 인도한 것은 신호등이었다. 갈림길에 설 때면 우린 신호등을 쳐다봤다. 그래서 먼저 켜지는 신호등을 따라 길을 갔다.

 

신호등이 카페로 이끌길래 들어갔다. 그래, 파리에 왔으면 차 한 잔 쯤은 해야지. 정작 카페를 찾아가는 팀은 안 따라갔으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카페에 들어갔다. 서툰 영어로 주문을 했다. 간결한 영어로 주문을 받았다. 그냥 즐거웠다. 3잔 시켰는데 4잔이 나왔음에도 한 잔씩 마시자며 키득거렸고, 카푸치노 거품으로 우유수염을 만들면서 또 키득거렸다. 뭐든 좋았을거다. 문호들이 단골로 삼았다던 유명한 카페는 아니지만 파리의 카페 아닌가. 이 곳에서, 이 시간에 좋은 사람들과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데 why not?

 

 길을 걸었다. 세느강변을 걸었다.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던 그 길을 걸었고, 버스를 타고 휙휙 지나쳤던 그 길을 걸었다. 맥주라도 한 캔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지만, 맥주를 마셨다면 이미 파리에 취한 우리에게 과음이 되었을 것이다. 다리를 몇 개나 건너고, 몇 번 왔다갔다 했을까. 밤이라 잘 나올까 걱정하면서도,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넷이 같이 찍을 수 없음에도 우린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 밤에 알았다. 에펠탑은 밤이 깊어질수록 화려해진다는 것을.

 

 걸으면서 알았다. 사람은 함께 걸을수록 정다워진다는 것을.

 

 글 쓰면서 알았다. 추억은 자꾸 되새길수록 힘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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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