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내가 그 곳에서 한 일은 동강 티셔츠, 동강 손수건 등을 주문받고 포장한 후 차를 끌고 가서 우체국에서 발송하는 일이었다. 오라이~~. 나는 그 가열찬 대정부 투쟁의 한복판에서 동강 티셔츠 등의 주문수량을 체크하고 입금을 확인하러 은행에 가며 하나하나 포장하고 있었다. 그 외에 내가 한 일은 설에 파는 우리 농산물 배달하기, 집회 나가면 세팅하기, 전단지 돌리기 등등이었다. 나는 환경련에서 은행에 통장확인하러 갔을 때 통장이 모자라면 프린트를 해서 이어 붙이면 된다는 사실과 택배 아저씨랑 친해지면 초과중량도 싸게 보낼 수 있다는 것, 중국집에는 이과두주라는 술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때 모 대학 법대 4학년생이 자원봉사를 왔다. 학점으로 인정되는 자원봉사였다. 나는 그냥 식권 받아 밥 먹고 술마시고, 누나들 모시는 재미로 다니는 자원봉사였지만, 그 분은 자원봉사로 학점을 딴다는 중차대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환경련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분은 불만이 많았다.
"제가 여기 이런 일 하러 온 거 아니거든요. 저에게 맞는 일을 주세요."
나는 열심히 포장을 하며 다른 활동가들과 궁시렁댔다. 그게 우리 일인데. 그 분의 높으신 뜻은 알겠으나 4학년짜리 법대생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일은 그 곳에 없었다. 4학년짜리 법대생은 능력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그저 몸으로 굴리고, 일손이나 거들면, 방해나 안되면 다행이다.
높은 이상, 크나큰 목표 좋다. 자신은 이만큼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데 사회가 기회를 안 주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99.999%의 경우 사회는 그 사람에게 맞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착각하지 말 것.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믿는 능력과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다르다. 대체로 사회가 평가하는 능력이 맞다.
설령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능력이 실제로 있다 하더라도 그 능력이 발휘될 기회가 오기까지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게 사회다. 당신이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당신 혼자만 가지고 있나?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능력인은 많다. 그럼? 기다려야 한다. 갈고 닦으면서, 잡일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기회가 다가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고, 해야 하는 전부다.
이건 잡일이니까, 허드렛일이니까, 내가 여기서 이런 일 하고 있어야 해 라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긴, 인생 바보같이 사는 사람이지.
'ㄱ 만화방'에 한 알바가 있다. 30대 중후반은 되는 남자다. 관악도서관에서도 몇 번 봤으니 고시생인 듯 하다. 근데 이 알바, "내가 여기서 만화방 알바나 하고 있어야 하는거야!!!"라는 분위기를 온 몸으로 풍기며 일을 한다. 누가 라면을 시키면 일단 한 두 번은 못 들은 체 한다. 귀? 잘 들린다. 그냥 씹고 보는거다. 라면 주세요 라는 재촉이 두 서너 번 이어지면, 라면을 왜 여기서 시키냐, 내가 너 따위에게 라면 끓여줘야겠냐 라는 표정으로 그 때서야 주문을 받는다. 아니면 이렇게 말한다. "10분 뒤에 시키겠어요.". 10분 뒤면 다음 알바가 온다. 자기는 다음 알바에게 "라면 시키신 분 있거든요"이라고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것도 생략하고 갈 때가 많아 기다리던 손님이 열 받은 적도 있다. (다음 알바가 불쌍하....지는 않다. 이 다음 알바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이 알바가 바로 위에서 말한 인생을 바보같이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순간을 낭비하고, 지금 하는 일을 심드렁하게 하는 사람이 무얼 한들 성공할 수 있을까? 고시 붙을 수 있을까? 고시 붙는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까? 순간의 삶을 사는 사람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인생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 라면을 끓이든, 포장을 하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 기회를 잡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다.
지금 /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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