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결혼에 군대에 어찌어찌하다보니 서른이 되어있었고, 그것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서른 둘이 되어보니 30대가 되길 잘한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지만 서른이라는 숫자가 좋다.
난 자유롭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자유인이었다. 중학교 때 수첩을 다시 꺼내드니 거기에도 자유를 꿈꾸는 글이 적혀있었다. 날고 싶다, 날고 싶다, 그렇지만 매인 것이 많다. 그 나이에 뭐가 그리 무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힘들게 인생을 사는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중학교 때 힘들었던 기억은 없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 전에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지 참 많이 생각했었다. 20대는 그걸 찾는 시기였던 듯 싶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면서 착한 일도, 나쁜 일도, 행복한 일도, 슬픈 일도 해봤다. 자랑하고 싶은 일도, 숨기고 싶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막 사는 게 자유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건 개망나니일 뿐이다. 순간의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건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지는 것. 얽매이지 않고 한 줄기 바람처럼 하늘에 떠오르는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것은 욕에 사로잡힌 것이다.
자유란 곧 무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모습이 자유로 보일지 모르지만, 파계승과 원효대사의 차이는 욕구마저도 초월한 무애에 있는 것이다. 욕구가 있으면 그에 따르되 구속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유다.
여자가 있다. 같이 자고 싶다. 자고 싶어서 잤다. 자고 나서는 다시 평온이다. 그게 무애라면. 자고 싶어서 잤으되 잤다는 사실에 얽매여 자신을 옭아매고, 상대방을 잡아두고, 그 기억에 헤벌쭉대는 것은 욕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잤다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자신의 태도다. 마음이다.
서른 두 해를 살고서야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에 파르르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지 잇속만 차리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고통의 뿌리를 보고 그가 가엽게 보인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시야에서 보면 인간사 다툼과 갈등은 사소한 일일 뿐이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영속의 시간이라는 프레임에서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따지는 것은, 내가 손해를 봤네, 그래서 억울하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도덕이나 법, 필요하지만 우습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리.
그러면서 한편으로 작은 것의 소중함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나를 미소짓게 하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나 큰 돈이나 이런 게 아니다. 가은이가 아장아장 걷다가 가만 나를 뒤돌아보는 순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 그런 것이 날 흐믓하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 내가 교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지난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나잇은 쿨하게 (2010.10.16) (0) | 2015.11.11 |
---|---|
팥죽 탐구생활 (0) | 2015.11.11 |
삼돌이 이미지 심어주기 목적의 집들이 (2009.12.5) (0) | 2015.11.11 |